문중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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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회연혁

조선시대~1989년
작성자장수황호안공파()작성일2022-08-31조회수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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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ㅇ 조선왕조실록 성종 15년(1484년) 2월 1일조에 호안공(胡安公)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는바 그 모두(冒頭)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황치신(黃致身)이 졸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이로써 당시 예장의 예에 따라 사패지(賜牌地)가 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ㅇ 사패지와 위토(位土)가 창평공(昌平公)의 후손인 보령(保寧)문중에서 관리되어 오다가 숙종 43년(1717년) 화재로 인하여 다른 문적(文迹)들과 함께 소실(燒失) 되었으며 이 사실을 본관(本官)에게 즉고(卽告)하였다.

  그로부터 69년 후인 영조 52년(1776년) 소실(燒失)된 문권 등의 내용을 성첩(成貼)하여 조정의 재가를 받으므로써 후일 고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웅천면 광암리(熊川面廣岩里)에 사는 황생원택(黃生員宅)  노비(奴婢) 세금(世今) 명의(名義)의 소지(所志)를 올려 재결을 받았는바 호안공 산소 관내의 위토관련 문권은 다음과 같다.

   「고양축산(高陽杻山) 호안공 산소 국내 노고봉(老姑峰)으로부터 세곡(細谷) 좌우, 앞은 산교(山校), 뒤는 서북령 넘어 아래로 110보 산기슭까지와 참의공 산소 국내 좌우와 뒤로 서북령 넘어 아래로 110보 산시표(山侍標)까지의 사패문권 1장.

    매득위토(買得位土) 밭 5섬지기(石落)와 논 17마지기(斗落)를 매매한 무생(戊生) 명의 문서 3장」이라고 되어있다. <별지참조>

  이로써 18세기까지 호안공 산소 국내의 위토는

    -노고산 동남쪽 기슭의 사패지와

    -역내산소(域內山所)의 수호를 위하여 매입한

        밭 5섬지기와 논 17마지기였음을 알 수 있다.

<별지>

 保寧宗人 地周宅 所藏 1776년 立案文券 寫眞>

 

 <토지등기 이후(土地登記 以後)>

  ㅇ 그 후 150여년간 관리되어 오면서 규모가 축소되어 1920년대 최초 등기된 바는 다음과 같다. 


   사패지(賜牌地)인 임야(林野)는   1924년(大正13) 4월 21일 지축동 산72번지 24町 9反 5畝(74,850평, 247,439㎡)만이 종손(宗孫) 황정연(黃正淵) 명의로 등기되었다.


  그러나 그 임야는 같은 달 26일 경성부 통의동(京城府 通義洞) 67번지 김영만(金永萬)에게 담보되었으며,     1926년 6월 30일 부채(負債)를 변제(辨濟)하고 7월 26일 저당권설정등기(抵當權設定登記)를 말소(抹消)하여 권리를 회복하였다.


  이는 종손이 생활이 곤궁하여 위 임야를 저당하였다가 상환을 못하여 경매단계에 이르렀으며, 이를 안 보령종중(保寧宗中)에서 수습하기로 결의하였다. 서울거주 황오현(黃五顯) 황의돈(黃義敦) 황의창(黃義昌)과 보령거주 황온(黃穩) 황두현(黃斗顯) 황의석(黃義錫) 등이 수습위원(收拾委員)이 되어 종토답(宗土畓) 1,400평 매각대금(賣却代金) 420원과 집집마다 거둔 돈 400원 계 820원을 마련하였다. 


1926년 6월 30일 채무를 변제하고, 7월 26일 저당(抵當)을 말소(抹消)하였으며 등기비용과 세금 등 제 비용을 전담하여 경매(競賣)를 저지(沮止)하고 원상복구(原狀復舊)한 것이다. 


  같은 날(1926년 7월 26일) 72번지 임야 24町 9反 5畝를 둘로 분할하여 72-1 10町 4段만을 종토(宗土)로 하고 잔여 72-2 14町 5反 5畝는 종손 황정연(黃正淵)에게 허급한 것이었으나 같은 해 8월 30일 방규환(方奎煥)에게 이전되어 우리 종중에서 일탈하였다.

 

   종토로 남긴 지축동 산 72-1번지 임야 10町 4段(31,200평, 103,140㎡)는 같은 해 8월 5일 창평공(昌平公) 후손인 보령(保寧)거주 황두현(黃斗顯) 황의돈(黃義敦) 황의창(黃義昌) 황찬주(黃瓚周) 황학연(黃學淵) 황수현(黃壽顯) 등 6인과 황해도 금천(金川) 거주 황정현(黃廷顯) 황윤주(黃允周) 황한주(黃漢周) 황순창(黃淳昌) 등 4인, 계 10인 명의로 등기하였다.

   위토(位土)는 1926년 7월 31일 지축동 383번지 답(畓) 1.119평(3,699㎡)과 동년 8월 6일 지축동 388-2번지 전(田) 667평(2,205㎡)이 종손 황정연(黃正淵)외 창평공(昌平公) 후손인 보령종인 황의돈(黃義敦) 황두현(黃斗顯) 황의창(黃義昌) 황찬주(黃瓚周) 황학연(黃學淵) 황수현(黃壽顯) 황정현(黃廷顯)등 7인 명의로 등기되었다.

  

 이로써 호안공 묘역내의 산소는 보령종중에서 주관하여 아래 종토의 소출로 수호하여 왔다.

    지축동 산72-1번지 임야 31,200평(10町 4段) 

    지축동 383번지    답(畓) 1,119평

    지축동 388-2번지 전(田)    667평

  그러나 위토가 건답박토(乾畓薄土)인 관계로 흉년에는 제수비(祭需費)도 부족하고 묘역보수비와 각종 세금 등이 충당되지 않아 보령종재(保寧宗財)로 부족분을 충당하여 왔다.

 

<광복후; 1945년 을유(乙酉)>

  ㅇ도유사(都有司) 制度를 종회장(宗會長) 制度로 변경하고 陰 11月15日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정하였다.

          회장 (會長): 황명현(黃命顯)

         문장(門長): 황창현(黃昌顯)

         유사(有司): 황의석(黃義錫) 황의익(黃義翼) 황헌주(黃憲周)

 

<1950년 경인(庚寅)>

  ㅇ 6.25사변으로 묘소를 돌볼 경황이 없는 상태였다.

  보령 거주 황의익(黃義翼) 유사(有司)께서 웅천으로 피난하였다가 9.28수복 직후 일시 상경한 자(子) 문연(文淵)에게 명하여

  -음력 8월 미상일 성묘를 하고,

  -최창설(崔昌卨)을 시켜 벌초를 하고 묘역을 정리케 하였다.

  -시향(時享) 역시 전시(戰時) 검문검색(檢問檢索)으로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여 보령종중에서도 후손들이 상경을 못해 최창설에게 명하여 제수를 마련, 문연(文淵) 단독으로 묘제(墓祭)를 올렸다.

    *최창설은 호안공 묘소 및 종토를 관리해 온 사람으로 본인은 11대째 관리하여 왔다한다. 몇 대 째인지는 고증할 길이 없으나 누대 관리해 온 것만은 확실한것 같다.

 

<1951년 신묘(辛卯)>

ㅇ 1951년 수복 후 위토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어 위토신고를 해야 하나 검문검색이 심하여 젊은이의 상경이 어려웠다. 고로 연세가 높으신 황의익(義翼) 유사께서 단독 상경하여 창설을 대동하고 호안공 위토신고(位土申告)를 마쳤다.

 

<1978년 무오(戊午>

 o 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호안공 묘사일에 전국 후손 참가 인원 배가하여 당시 종재로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1978年 음 10月 5일 시제 때 양정공파 의철(義喆) 임주(任周) 운주(雲周) 호(琥), 창평공파 덕주(德周) 능현(能顯) 등이 호안공파보(胡安公派譜)를 발간하여 운영자금 조성할 것을 제안하여 결의하고 우선 필요 운영자금으로 금60만원을 6사(六事)문중별로 배정하였다

   수입금; 30만원(남원종중 10만원, 연기문중 10만원. 용인문중 10만원)

    미수금: 30만원(병사공문중 10만원, 녹사공문중 10만원, 창평공문중 10만원)

 

<1980년 경신(庚申)>

  o 4月 호안공파보편집위원회(胡安公派譜編輯委員會)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황인술(黃仁述)을 선출(選出)하였다.

 

  o 1980년  7月 묘지위토(墓地位土)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여 동년 12월 6일 보령종중 황두현(黃斗顯)외 9인 명의로 등기되었던 지축리 산 72-1 임야 10정(町) 4단(段)을 호안공파종중(胡安公派宗中 주소; 保寧 熊川)명의로 등기 이관하였다

 

<1981년 신유(辛酉)>

 o 12月 호안공파보(胡安公派譜)가 완집(完輯)됨으로 동년 12월 육사문중(六事門中)이 참여한 새로운 종회창립에 대한 예비회담을 황석연(黃石淵) 변호사 사무실( 種根堂빌딩)에서 개최하였다

 

<1982년 임술(壬戌)>

 o 2月20日 서울 세종로 대한일보사 호안공보소(大韓日報社 胡安公譜所)에서 각 문중 대표, 수단유사 등 70여명이 모여 호안공파종회(胡安公派宗會)를 구성, 족보편찬위원회를 해산하고 회칙(전문19조)을 통과시켰다.

 

 

o 3月20日 초대회장(初代會長) 황인만(黃仁萬) 취임(就     任)

고   문(顧問): 인수(仁壽) 창주(昌周) 면주(冕周)

       호(琥) 의철(義喆) 석연(石淵) 도연(道淵)

       재연(在淵) 인복(仁福)

문중유사(門中有司: 흥주(興周) 의조(義祚) 해주(海周)  의룡(義龍) 응주(應周) 돈연(敦淵)

부 회 장(副會長): 덕주(德周) 익주(益周) 의남(義南) 용연(龍淵) 재연(在淵. 치연(置淵)

총    무(總務): 재연(在淵)

감   사(監事): 의주(義柱) 정연(正淵)

 

재실건립추진위원회(齋室建立推進委員會)

   위 원 장(委員長;) 인만(仁萬)

   위   원 (委員): 덕주(德周) 인수(仁壽) 의남(義南)                       재연(在淵) 의주(義柱) 의철(義喆)

 

 o 3月 31日 종회사무실을 종회장 인만(仁萬) 개인사무실 로 이전하다

 o 8月 17日 호안공재실 부지(胡安公齋室 敷地)를 지축리(紙杻里) 388-2 내(內) 388㎡로 선정(選定) 건축허가(建築許可)를 얻어 착공하다. 

 o 10월 5일 전388-2를 창평종중(昌平宗中)에 소유권 이전등기(所有權 移轉 登記)하다. 

        71.6.15 채권보전등기(債權保全登記)

 

<1983년 계해(癸亥)>

o 3월 30일 지축리 380-1 답 881평(2,912㎡)를 모용남(牟勇男)으로부터 매입하다.

o 5월 6일 지축리 산 72-1 임야 10정(町) 4단(段)을 보령종인(保寧宗人) 5인 명의(名義)로 등기이전(登記移轉)되다. 

o 10月 27日 호안공 재실(齋室) 준공(竣工)되다. 

    목조(木造) 기와 단층(單層) 97.56㎡(30坪)

    별돌 기와 부속사(附屬舍)  32.30㎡ (10坪)

 o 11月 10日 제2대회장(第二代會長) 의천(義天)취임   (就任) 

    고  문(顧問): 덕주(德周) 면주(冕周) 윤주(允周)   도연(道淵) 재연(在淵)

    부회장(副會長): 동주(東周) 정연(正淵) 의준(義準)    치연(致淵) 중연(重淵)

    총 무 (總務): 월주(月周) 의창(義昌)

    재 무 (財務): 임주(任周) 의태(義泰)

    감 사( 監事): 은주(銀周) 인형(仁亨)

  

 사무실(事務室)을 지축동 호안공재실(紙杻洞 胡安公齋室)로 이전(移轉)하다.

 

<1984년 갑자(甲子)>

o 4월 11일 지축리 산 72-1 임야 10정(町) 4단(段)을 새로 발족한 호안공파종회(주소; 고양 지축리)에 소유권을 이전하고 등기하였다. 1983년 5월 6일의 5인 등기는 1980년의 등기취지와 저촉되고 또한 종회의 요구가 있어 1984년 3월 14일 5인중 4인이, 그리고 6월 9일 해외거주자 1인이 持分을 抹消하므로써 완결하였다.

o 8월 27일 지축리 72-1에서 2,008평(6段 7畝, 6,637㎡)을 分割하여 72-12로 하고 남상선(南相善)에게 매도(賣渡)하였다. 그 결과 72-1 임야는 29,192평(9町 7段 3畝, 96,503㎡)가 되었다.  

o 10月 17日, 임원회 결의(任員會 決議)에 依하여 지축동(紙杻洞) 산72-1지번내(地番內) 철탑부지로 한전(韓電)에 지상권(地上權)을 설정(設定)해 주다. 

      84.10.17     39

       98. 1.19    248㎡ 계 287

      보상금(補償金 19.398.320원 수령(受領)

o 11월 6일 창평공파종회 소유 지축리 전 388-2에서 호안공 재실부지 388㎡(117평)을 분할 388-3으로 하고 지목을 대지(垈地)로 변경하였다.(등기(登記)는 미이전(未移轉), 388-2는 550평, (1,817)

 

<1985년 을축(乙丑)>

O 6월 11일 지축동 383-1 답 1,119평(3,699㎡)중 22평(73㎡)를 분할하여 지목변경 도(道)383-2로 하였다. 이로써 383-1은 1,097평(3,626㎡)이 되었다.

 

O 7월 25일 재실 및 부속사의 등기 완료.

 

<1988년 무진(戊辰)>

O 1988년  9월 15일 72-1중 해원선생묘역(海園先生墓域) 300평(991㎡)을 분활(分割) 72-13으로 하여 황석연(黃石淵)에게 할양, 72-1은 9정 6단 7무(9町 6段 3畝) 즉 28,892평, 95,512㎡가 되었다.     

 

O 1988年  9月에 지축동 산72번지 임야와 주변 전답 중 필요부분을 육군 3697부대가 국방을 목적으로 징발요구하였으며 종회에서는 이를 해결키 위하여 전국 산재 종인을 소집하여 반대결의와 군관계 요로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투쟁을 계속한 결과 우리 종회에서 필요한 면적은 제외하고 나머지를 군부에 매도키로 합의하다.

 

<1989년 기사(己巳)>

3월 15일 먼저 창평공파 종회에서 지축리 388-2 550평중 107평을 분할 388-4로 하여 호안공파종회에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호안공파 종회에서는 동년 3월 27일자로 산 72-1을 4개 지번으로 분할하고 답 380, 답 383, 전 388을 다음과 같이 처리하였다. 

 

분할(分割) 72-1  16,877㎡ (1町 7段; 5,105평   )⇒호안종회(胡安宗會所有)

          72-14  22,572㎡ (2町 2段 7畝); 6.828평)   ⇒국방부매도(國防部賣渡) .  72-15  27,844㎡  (2町 8段 1畝;( 8,422평)⇒호안종회(胡安宗會所有)  .  72-16  28,219㎡ (2町 8段 5畝; 8,536평) ⇒국방부매도(國防部賣渡)

    답(畓) 380-1    2,912㎡               ( 881평)  ⇒국방부매도(國防部賣渡) 

    답(畓) 383-1    3,626㎡              (1,097평) ⇒국방부매도(國防部賣渡)

           383-2      73㎡                ( 22평)  ⇒국방부매도(國防部賣渡)

           388-4      326㎡                ( 99평) ⇒호안종회 (胡安宗會所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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