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역사

문중역사

선세

始祖 瓊

仕新羅位至侍中 配慶州金氏 敬順王傅長女 按金氏始祖閼智出自鷄林至七世孫味鄒始爲新羅王至 敬順王九年歲乙未檀紀3268年讓於高麗 蓋侍中公寔在羅末麗初矣

시조 경

신라에 벼슬하여 직위(職位)가 시중(侍中)에 이르시었다. 배위는 경주김씨니 경순왕(敬順王) 부(傅)의 장녀(長女)이시다.
상고하건대 김씨 시조는 알지(閼智)니 계림(鷄林)으로부터 나와 7세손 미추(味鄒)왕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왕이 되었고 경순왕(敬順王) 9년인 을미년 단기3268년에 이르러 고려에 양여하였으니 대개 시중공(侍中公:즉 始祖 瓊 )께서는 바로 신라말 고려초에 계셨던 분이었을 것이다.

追記

公이 仕新羅하여 位至侍中하니 侍中者는 新羅 執事省侍中之謂니 國家 機密과 庶政百官之總領이요 行政機關之長官也라 配는 慶州金氏니 敬順王 諱傅의 長女니 正宮竹房夫人 朴氏 所生이다.
按金氏始祖는 閼智니 出自鷄林後에 至七世孫味鄒하여 始爲新羅王하고 至敬順王 九年乙未歲(檀記3268年 西記935年)하여 讓于高麗하니 盖侍中公은 寔以羅末麗初之人으로 翼成公(방촌 諱喜)이 21世孫也요 且敬順王이 有三女하니 長女는 寔侍中公(諱 瓊)之配로 竹房夫人 朴氏 所生이요 次女는 適高麗景宗하니 獻肅王后로 樂浪公主王氏所生이요 三女는 適慶州李金書하니 別嬪順興安氏 所生也라.
檀記4333年 庚辰 3月 日 後孫 義屯 記

추기

공이 신라에 벼슬하여 지위가 시중에 오르니 시중은 신라 집사성 시중을 말함으로 국가 기밀과 모든 정사와 백관을 총괄하는 총령이요 행정기관의 장이다. 배는 경주김씨니 경순왕 휘 부의장녀니 정궁이신 죽방부인 박씨 소생이라. 고찰해보건대 김씨 시조는 알지니 계림에서 나온 후에 7세손 미추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왕이 되고 경순왕 9년 을미년(단기3268년 서기935년)에 이르러 고려에 양여했으니 대개 시중공은 곧 신라말 고려초의 어른으로 익성공(방촌 휘 희)이 21세손이요. 또 경순왕이 세 따님을 두니 장녀는 바로 시중공 휘 경의 부인이니 죽방부인 박씨 소생이요 차녀는 고려 경종왕에 출가하니 헌숙왕후로 낙랑공주인 왕씨 소생이요 3녀는 경주 이금서에 출가하니 별빈 순흥안씨의 소생이다.
단기4333년 경진 3월 일 후손 의둔 기
※시조 경(瓊)으로부터 8세손까지의 기록은 없다.

後孫 公有

始祖新羅侍中諱瓊之九世孫 事高麗 明宗官至殿中監時權奸李義方當國稔凶因舊日孫秀之嫌必欲甘心公見幾投佩還長水故鄕又避縣官之物色설家移卜于南原地子孫仍世居今廣寒樓卽其舊基也 按自高麗太祖元年歲戊寅檀紀3251年至高麗明宗元年歲辛卯檀紀3504年爲254年 高麗毅宗14年歲庚辰檀紀3493年武臣鄭仲夫李義方等作亂盡弑文臣放王于巨濟尋弑之迎立高麗明宗專擅國政後伏誅等史詳考則可以推知其公之世次矣

후손 공유

공은 시조이신 신라 시중 휘 경의 9세손으로 고려 명종을 섬기여 벼슬이 전중감에 이르시었다. 그때 권간 이의방이 국정을 맡아 봄에 흉악을 들어내고 전날 손수지의 협의로 인해 반드시 죽여 쾌한 마을을 얻으려하니 공이 그 기미를 보고 벼슬을 던지시고 고향인 장수로 돌아오셨는데 또 현관들의 물색을 피하시어 가솔을 거느리고 남원 땅으로 옮겨 사시어 자손이 이어 세거하게 되니 지금의 광한루가 곧 그 구기(옛집터)이다.
상고하건대 고려 태조 원년 무인 단기3251년으로부터 고려 명종 원년 신묘 단기3504년에 이르기까지 254년이 된다. 고려 의종 14년 경진 단기3492년 무신 정중부와 이의방 등이 난을 일으켜 문신을 모두 죽이고 왕을 거제에 방류한 뒤 이어 시해하고 고려 명종을 영립하고 국정을 전천하다가 뒤에 복주당하는 등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가히 공의 세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後孫 監平

始祖新羅侍中諱瓊之十五世孫 百家譜云有諱公有之六世孫 太學生號逸齋早遊횡舍華聞大播一朝謝迹名場歸守東岡探討墳典訓誨後學世皆尊尙其節載於東國名賢錄 世祖二年歲戊寅檀記3791年11月望前一日 烈成公諱守身廣漢樓謹記文遠祖諱公有長水縣人也事高麗明宗位殿中監素與李義方有隙及義方用事欲害之投佩歸鄕縣守希義方志又將執之(潔-삼수변)家移此邑(南原)自此世居焉後孫諱鑑平遊太學以才名擅再擧不第(番+羽)然有樂天知命之志還鄕(재방변+(溝-삼수변))書堂以文籍自娛學徒多師事之五代生諱君瑞是僕親祖(君瑞郎烈成公守身祖考)

후손 감평

공은 시조 신라 시중 휘 경의 15세손이니 백가보에 이르길 공은 공유의 6세손이라고 하였다.
공은 태학생으로 호는 일재이시니 일찍이 태학에 유학하여 화문(좋은 명성)이 크게 전파되더니 일조에 명장을 사절하고 동강에 돌아오시어 수절하고 분전(서적, 三墳五典)을 탐구하며 후학을 훈육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다 그 고절을 높이 숭상하였으며 이 사실은 동국명현록에 실려있다.
세조 2년 무인 단기3791년 11월 14일에 열성공 휘 수신께서 삼가 쓰신 광한루 기문에 "저의 원조 공유 는 장수현인이시니 고려 명종을 섬겨 벼슬이 전중감에 이르시었는 바 평소 이의방과 사이가 졸지 않았으며 이의방이 정권을 쥐고 공을 해치고자 하므로 벼슬을 버리시고 고향으로돌아오시었는데 현감이 이의방이 뜻을 맞추기 위하여 또한 장차 체포하려 하거늘 가족을 거느리고 이 고을(남원)에 이사하시어 이로부터 세거하게 되었다.
후손 감평은 태학(성균관)에 유학하시어 재명으로 날렸으나 두번 과거에 등과하지 못함에 번연 낙천지명의 뜻을 가지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시어 서당을 지으시고 문적으로써 스스로 즐겨 지내시니 학도들이 사사한 사람이 많았다. 5대(감평의 5대)에 군서를 낳으시니 이 분이 저의 친조부님이시다." 고 기록되어 있다.(군서는 즉 열성공 휘 수신의 친조부임)

後孫 石富(一世 中始祖)

逸齋(諱鑑平)曾孫 贈吏曹判書 自始祖至公爲十八世孫而中世譜失無徵 配海州崔氏麗朝大提學平章事景文公洪胤女平章事瓘孫文憲公(이수변+中)之后開府儀同三司上柱國昌原(舊譜에鐵原)崔詵外孫 是爲中始祖一世也 生一男諱均庇

후손 석부

공은 일재(휘 감평)의 증손으로 증이조판서이시니 시조(휘 경)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18세손이 되며 중세에 족보가 분실되어 증거학 수 없다.
배위는 해주최씨이시니 고려조의 대제학이요 평장사인 경문공 최홍윤의 여이시고 평장사 최관의 손이요 문헌공 최충의 후손이요 개부의동삼사상주국 창원(구보에는 철원으로 되었음) 최선의 외손이시니. 이 어른이 중시조로 보첩상 1세이시고 1남을 낳으시니 휘는 균비이시다.

後二世 均庇

逸始祖新羅侍中諱瓊之十九世孫有爲鑑平之玄孫 讀書未施而卒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配贈貞敬夫人晉州姜氏 生一男諱君瑞

2세 균비

공은 신라 시중 휘 경의 19세손이시고 휘 감평의 현손이시니 글을 읽으시었으나 뜻을 이루시지 못하시고 졸하시니 증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시고 배는 증정경부인 진주강씨이시다. 1남을 낳으시니 휘가 군서이시다.

三世 君瑞

始祖新羅侍中諱瓊之二十世孫有鑑平之五世孫 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兼領經筵判吏曹事行資憲大夫判江陵府事(言+音)鍊典故明達理爲一代名臣 配贈貞敬夫人龍宮金氏父監門衛護軍祐 生二男長諱中粹次諱喜

3세 군서

공은 시조 신라 시중 휘 경의 20세손이시고 휘 감평의 5세손이시니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판이조사 행자헌대부 판강릉부사이시니 전고에 익숙해서 사리에 밝게 통달하여 일대에 명신이 되시었다. 배는 증정경부인 용궁김씨이시니 부는 감문위후군 휘 우이시다. 2남을 낳으시니 장남은 휘 중수시고 차남은 휘 희이시다.

4세 중수(中粹)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7세손 이후 무후(無後)
희(喜) : 영의정(領議政)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4세에 비로소 형제가 되었으나 판중추부사 중수는 7세손 이후 무후(無後)되어 현재 장수황씨는 모두 황 희(黃喜)의 후손이다.

그는 아들 4형제를 두었는 바 장(長)은 호안공(胡安公) 치신(致身)이요, 중(仲)은 증한성소윤(贈漢城少尹) 보신(保身)이요, 숙(叔)는 열성공(烈成公) 수신(守身)이요 계(季)는 사직(司直) 직신(直身)으로 모두 벼슬하여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지파(支派)의 파조(派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2000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人口調査)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살고 있는 장수황씨(長水黃氏)는 총 45,567가구에 146,575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000년 장수황씨 대종회(長水黃氏大宗會)에서 편찬한 장수황씨세보(長水黃氏世譜; 庚辰譜)에 등재된 인원은 83,238명으로인구조사 결과의 56.8%이며 지파별(支派別) 분포상황(分布狀況)은 인구 분포도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