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역사

문중역사

시조 및 본관

시조

장수황씨의 시조는 황 경(黃 瓊)이다.

1723년(景宗 癸卯)에 편찬된 장수황씨세보(長水黃氏世譜)에 시조는 경(瓊)이며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배(配)는 경주김씨 (慶州金氏)니 경순왕(敬順王) 부(溥)의 딸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후일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당대 석학(碩學) 조인영(趙寅永)도 1831년 운계(雲溪) 황신구(黃信龜)의 비문에 ‘신라(新羅) 상주(尙主 = 駙馬) 경(瓊)이 비로소 득성(得姓)하였다’라 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라는 문헌에 의하면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무신(武臣) 구대림(丘大林)과 문신(文臣) 황락(黃洛)이 교지국(交趾國)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평해(平海)에 표류하였는바 황락이 그곳에 거주하여 황씨(黃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라 되어있고, 그 차자(次子) 을고(乙古)가 장수황씨의 조상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헌(文獻)은 모화사상(慕華思想)이 극에 달했던 조선 후기(後期)의 저술로 추정할 뿐 작자와 연대가 모두 미상하고 내용이 황당하여 장수황씨는 이를 하나의 전설로 생각할 뿐이다.

본관

‘여지승람 전라도 장수현 성씨조(輿地勝覽 全羅道 長水縣 姓氏條)에 본현 황씨(本縣黃氏)라 되어있으며, 경(瓊)의 9세손(世孫) 공유(公有)가 고려 명종(明宗)때 무신(武臣)의 변(變을) 피하여 고향(故鄕) 장수(長水)로 돌아왔고, 다시 지방 관헌을 피하여 남원(南原)으로 옮겼다.

이어 후손이 이곳에 살았으니 광한루(廣寒樓)가 그 구기(舊基)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장수(長水)는 본래 백제의 우평(雨坪)이었는데, 신라때 고택(高澤)으로 고쳐 장계군 (長溪郡)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남원부(南原府)에 속하게 하였다‘ 라고 같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명종(明宗) 이전의 고려시대부터 장수(長水)를 관향(貫鄕)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