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廷直, 1581 - 1657] | |
---|---|
작성자장수황호안공파(hwgej@naver.com)작성일2022-10-13조회수1138 | |
파일첨부 c798efd466b992a492165726ccedad0d.jpg | |
* 생몰년 : 1581(선조 14) - 1657(효종 8) 공의 고는 예빈시 직장 증좌승지 호는 松齋 휘는 즙(葺) 일찍이 부친의 병을 侍從함에는 마음의 우려를 안색에 내지 않고 밤에도 옷을 벗지 아니 하였으며 하늘에 기도하기를 자신으로 대신하게 해 달라고 하였으며 대변을 맛보며 치료에 극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에 병환이 위급해지자 指血로써 부친의 입에 흘려 넣어 이미 끊어진 목숨을 소생시켜 십여일간 목숨을 연장하였으나 마침내 人力으로 천수를 어찌할 수 없어 드디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거상에 있어 비애와 號痛이 하늘에 사무치도록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졌다. 상례 절차를 한결같이 예의 범절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준수하였다. 묘근처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조석으로 호읍하기를 3년을 하루같이 하였을 뿐더러 자택과 묘소와의 거리가 10 여리나 되고 또한 조수가 막혀 왕래에 큰 불편이 있었으나 매일같이 모친에게 귀성하고 반드시 여막으로 돌아가기를 의당사로 여겼다. 물고기 뛰어나오고 멧돼지가 스스로 나와 珍羞를 봉양하게 되니 역시 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향당에서 효도를 칭송하니, 원근 마을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갑술년에 모친상을 당하여서도 역시 여막에 살면서 애통하기를 일체 부친상과 같이 하였다. 광해군의 정란을 보고 세상에 뜻이 없어져 작은 정자를 축성하고 송죽에 뜻을 붙여 따라서 당호를 쌍벽당이라 게양하고 거기에서 한가롭게 자기의 분수에 만족하게 여기고 끝까지 그 정개(貞介)를 변하지 않고 지냈다. 인조 을축에 유생들의 천거로 임금으로부터 효행을 가상히 여겨 司圃暑 別提로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계유에 정문을 세워 포장하라는 聖明이 효리의 정책으로 특별한 은전을 내린 것이다. |
이전글 | 황신묵 |
---|---|
다음글 | 위[暐, 1605~1654] |
|